'에너지 안보' 중요성 커지자···글로벌 '기후변화 대응' 이렇게 달라졌다
러시아 사태 이후 에너지 안보위기론 득세 “화석연료도 배제하지 말아야” 목소리 커져 중국은 석탄발전 늘리고 미국도 친환경 후퇴 유럽,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 낮추려 화석연료발전 확대
[이넷뉴스] 전 세계가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해 탄소중립의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서 지금은 친환경 에너지 전환보다 에너지 수급 을 우선시하고 있다. 각국이 화석연료 감축 노력을 중단함으로써 청정에너지 전환이 후퇴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 러시아 사태 장기화로 원유·천연가스 가격 폭등···에너지 안보 위기 고조
“기후 변화 목적을 위해 재생에너지, 청정에너지원에 대한 투자를 가속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크리스티아나 피게레스 전 유엔기후변화협약 사무총장은 지난 18일(현지시각)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현 상황을 이같이 꼬집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에너지 안보 위기론이 득세하고 있다. 에너지 수급 상황이 악화하고 가격이 치솟자 ‘안보’ 차원에서 접근하는 국가가 늘고 있다. 친환경보다 에너지의 안정적이고 합리적인 공급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이에 화석연료를 완전히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다시 거세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전세계 탈탄소 정책이 이행에 차질을 빚을 것으로 전망한다.
현재 미국 천연가스 가격은 13년 만에 최고치로 뛰어올랐다. 액화석유가스(LPG) 가격 역시 최근 10년 사이 최고 수준이다. 유가가 연일 상승해 올해 두바이유 기준 평균 가격이 100 달러를 넘길 것으로 예상된다.
원유와 천연가스 가격이 폭등하면서 전 세계적인 에너지전환 흐름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당장 부족한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 가장 저렴한 석탄의 비중이 커지는 것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지난해부터 올해 석탄 사용량 증가 추세로 볼 때, 최소 2024년까지 석탄 소비량이 증가할 것이며, 석탄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가 최소 30억 톤 이상 증가할 것으로 추정했다. 지난해 전 세계적으로 석탄을 통한 전기 생산은 전년 대비 9% 증가했다.
IEA는 “현재 나타나는 지표들은 세계 각국의 탄소중립 목표와 현실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며 우려했다.
◇ 중국 석탄발전 늘리고, 미국 친환경 후퇴
많은 나라들이 탄소중립보다 에너지 수급 안정성 확보에 초점을 맞춰 에너지전환 정책 궤도 수정에 나서고 있다. 미국과 중국 두 강대국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그동안 ‘온실가스 배출 주범’ 오명을 벗기 위해 석탄화력발전을 줄이는 등 친환경 정책을 강화해왔다. 그 결과, 중국의 화력발전 비중은 2013년부터 줄곧 내려가 2020년 70.4%까지 줄었다. 하지만 지난해 70.6%로 다시 반등했다. 중국은 연료용 석탄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올해 석탄 생산량을 더 높일 계획이다.
미국의 친환경 정책도 에너지 가격 급등에 밀려 주춤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및 글로벌 공급망 혼란으로 인플레이션을 겪으면서 공공 부지에서 석유와 가스 시추를 다시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이달 초에는 러시아산 원유 금수 조치에 따른 유가 상승을 잡기 위해 향후 6개월간 매일 100만 배럴의 전략 비축유를 방출한다고 발표했다. 새로운 석유 시추를 막고 탄소 배출을 줄이겠다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공약은 세계적인 에너지 수급난에 유가가 급등하면서 뒤집혔다.
◇ 발칸반도, 글로벌 에너지 위기에 석탄 의존도 '더' 높아져
러시아 사태는 발칸반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에너지 가격이 치솟자 발칸반도에서 석탄 의존이 더 높아지고 있다고 로이터통신이 1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발칸반도에 위치한 나라들은 석탄 매장량이 풍부해 석탄화력발전이 에너지 믹스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석탄 화력발전소들이 막대한 양의 이산화황을 배출하는데다 오염 물질을 가장 많이 배출하는 갈탄을 전력 생산의 주연료로 써와 유럽 내 '대기오염의 주범'으로 꼽혀왔다.
글로벌 비정부기구(NGO) 네트워크인 CEE 뱅크워치가 지난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세르비아, 코소보,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부 마케도니아 지역에는 모두 18개의 석탄 화력발전소가 있는데, 이들이 대기 중에 내뿜는 이산화황의 규모는 유럽연합(EU) 국가에서 가동 중인 221개의 석탄 화력발전소 총 배출량의 2.5배에 달한다.
이들 국가들은 이에 2020년 11월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서발칸 정상회담을 열고 2050년까지 탄소중립 실현의 뜻을 모았다. 석탄 이용을 줄이는 것을 골자로 한 국가별 에너지 전환 대책을 강구 중이었으나, 다시금 원상복귀되는 모양새다.
북마케도니아는 발전용 원료로 쓰이는 석탄 탄광 2곳을 새로 열 계획이다. 앞서 북마케도니아는 2027년까지 석탄발전을 단계적으로 폐기할 방침임을 밝혔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에너지 위기가 불거지자 올해 초 2030년까지 기한을 연장했다.
세르비아는 최근 강우량이 부족해져 수력 발전에 차질이 생기자 이를 대체할 발전용 석탄 생산을 늘리는 중이다. 발칸반도 국가 중 유일하게 전력을 수출하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와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석탄 발전소 폐쇄 계획을 연기하기로 했다.
북마케니도니아 국영 전력회사인 북마케도니아발전(ESM)의 바스코 코바체프스키 최고경영자(CEO)는 "이번 에너지 위기가 불거지면서 우리뿐 아니라 유럽 전역이 가장 안정적이고 저렴한 발전원인 석탄을 통한 전력 생산을 즉시 늘렸다"고 설명했다.
◇ 유럽 에너지전환 정책 차질 우려 “현 상태라면 목표 달성 어렵다”
유럽의 에너지원별 러시아 의존도는 원유 등이 27%, 천연가스 41%, 석탄은 47%에 이른다. 유럽연합(EU)은 연내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을 66%까지 줄이고 오는 2027년까지 러시아로부터 에너지 수입을 전면 금지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올해 말까지 러시아 가스 수입량을 3분의 2가량 줄이기로 했다. 지난 7일(현지시간)에는 러시아산 석탄 금수 조치 등을 담은 5번째 제재안을 승인했다. 다음 제재로 러시아산 석유 수입 금지를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
EU는 이를 위해 ‘에너지 자급자족’의 계획을 세웠다. 풍력,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의 신규 누적 설치량을 2030년까지 각각 480기가와트(GW), 420GW 확보하기로 했다. 또 지난해 러시아로부터 수입한 천연가스 물량을 2030년까지 수소로 대체한다. 그린수소 생산 능력을 당초 계획보다 2배 확대해 2030년까지 80GW로 늘릴 계획이다.
2030년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1990년 대비 최소 55% 감축하기로 약속했지만, 현 상태라면 목표 달성이 어렵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일부 국가들이 ‘에너지 가격 급등’이라는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해 오히려 화석연료 사용을 늘리고 있어서다. 청정에너지 확대에 많은 시간과 비용이 투입되는 것도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특히 독일의 석탄화력발전 비중이 우크라이나 침공 전 25%에서 침공 후 37%로 크게 증가했다. 독일은 2030년까지 폐쇄할 계획이던 석탄발전소 운영을 연장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다른 유럽 국가들도 러시아산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 탈석탄 정책을 유보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23일 "EU의 최대 천연가스 및 석유 공급국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각국 정부는 러시아산 화석연료 의존도를 줄이려는 계획을 가속화하고 있다"면서도 "유럽의 원활한 에너지 전환은 어려울 것"이라고 보도했다.
NYT는 "이번 위기는 유럽이 청정에너지에 더 빨리 도달하도록 자극했다"면서도 "러시아산 에너지를 대체하고 가격을 낮추기 위해 각국이 화석연료 감축 노력을 중단함으로써 청정에너지 전환이 후퇴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사무총장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전 세계가 기후위기 대응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게 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주요 경제국들이 러시아산 화석연료를 대체하는 것을 가장 우선시하면서 화석연료 감축 정책을 무시하고 있다”며 “이는 화석연료에 대한 장기적인 의존으로 이어져 (지구온도 상승폭 제한 목표인) 1.5도로 향한 창을 닫아버릴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이넷뉴스=김그내 기자] snowcat74@enetnews.co.kr